인생은 여행이다/한글로의 인도 여행

1998년 한글로의 인도 여행기 (1)

다음블로그한글로 2006. 7. 4. 14:39

1998년 한글로
끄적 끄적 옛날 인도 여행기 (1)

 

 

인도 영화 즐김이

한글로

 

 

저는 대학생이던 시절, 1997년과 98년에 인도 여행을 했습니다. 다들 선진국으로 어학 연수를 갈때, 그토록 생소한 '인도'를 택한 것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지요.

 

옛날에 써 놓은 글들을 읽다가 (이미 인터넷에 올린지도 7-8년이 넘었군요), 저에게도 이런 용기가 있었는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올려봅니다.

 

이미 이 이야기는 10년의 세월을 넘어가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저의 추억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이제 과거의 여행기 속으로...

 

그 시절에 썼던 글을 토씨하나 안고치고 올립니다.

이미 예전의 일이니 다들 너그러이.. ^^

 

 

-=-=-=

 

인도로 가는 길 - 모금 운동을 하다

 

 

- 요 며칠 사이에 말이에요. 계속 이상한 꿈을 꾸곤 해요. 어디서 본듯한 거리에서 제가 어느 장사꾼이랑 마구 싸우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은 한국말이 아니라 아주 유치한 수준의 인도말이죠. '끼뜨나(얼마냐?)' 하고 물어보면 '떨티(30) 루피스'라는 대답에 '마항가해(비싸다!)'라고 찡그리고 다시 '깜까로나(깎아줘!)'라고 하는거죠. 그런데 절대 상대방은 안깎아주죠. 그래서 계속 다투다 보면 잠에서 깨어나요.

 

대학 4학년의 여름방학은 정말 중요한 시기라고들 합니다. 그것이 요즘처럼 IMF시대 하의 취업 대난 속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죠. 모두들 영어를 비롯한 어학과 여러가지 취업준비로 고3 수험생들보다 더 바쁜 생활을 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런 4학년의 여름방학을 몇주일 앞두고 갑자기 인도행을 결심했습니다. 무조건 인도를 가겠다고 결심했지만, 모아 놓은 돈도 없는 놈이 인도를 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참 많았습니다.

 

일단 비행기표는 작년에 비해 가격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50만원이었죠. 작년엔 45일 오픈티켓이었는데 올해는 두달 오픈티켓이랩니다. 모아둔 돈을 톡톡 털어서 일단 비행기 표를 샀습니다. 이제 체제비가 문제였습니다. 두달 오픈티켓이었으니 무조건 여행기간을 50일로 잡았습니다. 하루에 만원을 기준으로 50만원이 필요했습니다. 아니, 환율을 감안하면 그보다 더 큰 돈이 필요했지요. 하지만 그 돈을 구할 길은 암담했습니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는 정말 싫었습니다. 졸업을 앞둔 놈이 인도를 간다고 폭탄 선언 한것도 부모님께 못할 짓이었는데 어떻게 돈을 달라고 손을 벌린단 말입니까?

 

그래서 가상으로 만들어 둔 시나리오 하나를 실행하기로 했습니다. 제 다이어리에 적힌 '구걸여행'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것이죠. 최악의 상태일때 써 먹으려고 꾸며둔 시나리오가 이렇게 빨리 써먹힐 줄은 몰랐습니다.

 

뜻밖에도, 저의 당돌한 '구걸'에 많은 분들이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하루에 1만원, 최대 이틀까지만 도와 달라는 편지. 보답은 돌아와서 기행문으로 대신하겠다는 내용.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내용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격려를 해주셨고 규정(?)을 어기고 많은 돈을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친구녀석도 이틀을 책임지겠다고 돈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돈이 조금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한 친구에게 목돈을 빌렸습니다. 인도를 다녀와서 갚는다는 조건이었죠. 그렇게해서 500달러를 마련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부모님은 모르고 계셨습니다.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1998년 7월 1일
떠나기 직전 집에서 기념사진
가방의 무게가 욕심의 무게
 

그렇게 인도에 저는 또다시 발을 들여 놓고 있습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갑자기 웃음이 나옵니다. 입이 찢어져라 빙긋이 웃으며 공항을 빠져 나옵니다. 이상하게 웃음이 그치질 않습니다. 기분이 너무나 좋습니다.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꼴라바 구역까지 어떻게 가나 걱정했는데 사업을 하시는 아저씨의 도움으로 편하게 승용차를 얻어타고 갈 수 있었습니다. 시작부터 아주 좋은 일이 생기는군요.

 

눈에 익은 거리에 들어서니 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다시 인도의 냄새를 한껏 들이켜 봅니다. 특유의 냄새가 온몸에 스며듭니다. 그렇습니다. 반복되었던 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시 인도에 가야만 한다는... 저는 꿈속의 그 거리에서 흥정을 합니다. 깜까로나(깎아줘), 마항가해(비싸다구), 헤이 프랜드, 플리즈!

여행일자 : 1998년 7월 2일
1998.8.13.
한글로.

 

 

 

(인도를 가기 위해 게시판에 올렸던 글)

 

한글로를 하루만 책임져 주십시오!

□ 글 올린곳 : 천리안 한가족 동호회

□ 글쓴날 : 1998년 6월 22일 


 [번  호] 1199 / 5644      [등록일] 1998년 06월 22일 01:07      Page : 1 / 4
 [등록자] 한글로           [이  름] 한글로           [조  회] 75 건
 [제  목] [한글로] 한글로를 하루만 책임져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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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글로를 하루만 책임져 주십시오 >
 
안녕하세요. 한글로입니다.
 
제가 이번 여름에 또다시 인도로 향하려고 합니다. 약 50일정도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IMF인데 무슨 해외여행이냐 하고 호통을 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여행을 위해 많은 고민을 했고 이것이 그 결론입니다.
 
운이 없다는 말이 있죠. 저는 배낭여행 붐이 일어나던 시기에 '당당하게 해외여행
자격을 얻기위해' 군대를 갔다 왔습니다. 그래서 꿈에 그리던 인도를 다녀오게
되었는데, 곧바로 IMF가 터져서 저의 4대문명 발상지 방문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모아 놓은 돈이라고는 아르바이트를 거의 안하기 때문에 어쩌다가 생기는 부수입(?)
을 챙겨 놓은 것이 있는데, 이것으로는 비행기 삯 정도 밖에 안될 듯 합니다.
(참고로 비행기 삯은 53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인도 여행을 위해서는 체제비가 필요한데, 저의 작년 경험으로는 하루에 만원정도면
모든 것이

해결된 듯 합니다. (물론 예산은 그랬지만 실제로는 25만원 정도만 들었
습니다.) 그때 환율로 1만원이고 지금은 만 오천원정도가 되겠지요. 하지만, 예산은
작년과 똑같이 '하루 만원'을 기본으로 하고 경험을 살려서 최대한 아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50일 정도면 또다시 50만원 정도의 예산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이런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 손을 내밀기로 했습니다.
 
여러분께서 한분씩 저의 '하루(만원)'씩만 책임져 주십시오. 여유가 있으신 분들은 이
틀을 책임져 주셔도 됩니다. 하지만 이틀 이상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렇게 쉽게(?) 큰돈을 모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상한은 이틀로 정했습니다.
 
그렇게해서 모은 돈으로 뜻있는 여행을 하고, 그곳에서 보고 느낀 것을 기행문으로
여러분께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비록 글솜씨도 어줍잖고 아직 어린 나이라 보고
느끼는 정도가 유치한 수준이긴 하지만, 저의 최선을 다할것을 약속 드립니다.
 
이번 여행이 저에게는 큰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1차 인도여행이 저를 많이 바꾸어
놓았듯이 이번에도 많은 것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 이런 전환기를 맞는
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분이라도 좋습니다. 만약 대여섯분만 도와주신다 해도 저는 모든 돈을 긁어서라도
갈 작정입니다. 한번 칼을 뽑은 이상, 후퇴는 없습니다.
 
도와주실 분들은 아래의 구좌로 입금

해 주셔도 되고 따로 불러서 술한잔 사주시면서
호주머니에 돈을 찔러 넣어주셔도 됩니다. :)
 
  예금주 < *** >
 
 조흥은행 : 329-06-XXXXXXX
 국민은행 : 012-21-12XX-XXX
 기업은행 : 043-036016-XX-XXX
 우체국   : 012757-005XXXX
 
이 글이 물의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글을 띄웁니다.
 
감사합니다.
 
1998년 6월 22일 새벽
한글로 올림.        

 

 

 

-=-=-=-==-

 

(다시 현재로..)

이 하나의 글로 저는 인도에 갈 수 있었고,

그 인도에서의 체험이 나를 있게 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 중 글 하나를 공개해 봅니다.

 

 

위의 출발 당시의 사진과 달리

1998년 7월의 어느날입니다.

 

한 달도 안되는 사이에 인간이 이렇게 달라졌지요.

 

 

-=-=-=

 

 

 


Mother Teresa(1910-1997)
면 테레사 수녀님의 추모 홈페이지 http://www.drini.com/motherteresa/

 

 

 

<조병준, 오후 4시의 평화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그린비>
<조병준,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나는천사를 믿지 않지만- 박가서장>

(위 두 권의 책은 죽음을 기다리는 집에서 봉사활동을 오랫동안 했던 한국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긴 책입니다. 서점에 가서 꼭 한권씩 장만하세요. 이 책 인세의 일부는 인도로 보내지니까요)
 

이제 깔리가트에서 일한지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이제 완전히 이곳에서의 일은 제 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서 볼일을 보고 샤워를 끝내고 나면 여섯시 이십분이 됩니다. 옷을 입고 집(저는 센타포인트란 곳으로 숙소를 옮겼습니다)을 나섭니다. 가다가 같이 일하는 누나를 만나서 막 깨어나는 지구 최악의 도시라 불리는 곳을 걸어 갑니다.

 

소방서를 지나 왼쪽으로 돌아서 조금 걸어가면 무슬림들이 운영하는 고기집이 즐비합니다. 냉장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이곳에서는 아마 아침에 잡은 고기를 저녁까지 팔아치우지 않으면 안될겁니다. 닭을 자전거 뒷쪽에 가득 싣고 가는 아저씨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리가 묶여서 꽥꽥거리는 닭들의 비명이 오히려 유쾌하게 들리는군요.

 

저를 깔리가트로 이끌었던 누나는 새를 무서워 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그 덩치 큰 누나가 까마귀 한마리만 떠도 기겁을 하고 제 뒤로 숨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반드시 그 누나와 같이 이 길을 길어야 합니다. 안그랬다간 이 누나는 길거리에서 기절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꼬불꼬불, 처음에는 길을 잊어먹을 정도로 복잡했던 이 골목들이 이젠 제법 눈에 익습니다. 퀴퀴한 특유의 냄새, 비라도 조금 오면 질퍽거리는 이 길조차도 몇십년을 지낸 듯이 친근감있게 느껴집니다. 새하얀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어줍니다.

 

마더테레사 본부에서 아침을 먹는것은 아시죠?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으면 바나나는 절대 못먹습니다. 빵 세조각과 짜이 한잔이 바로 저의 아침입니다. 마당 가득히 앉아있는 친구들과 눈인사를 건넵니다. 머뭇거리는 사람은 틀림없이 오늘 처음 온 '초짜' 입니다. 그들 앞에선 좀 으쓱거리며 여유로움을 뽐내 보기도 하죠.

 

정확히 일곱시 이십분이 되면 깔리가트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버스 번호는 204, 205, 45-B입니다. 45B는 깔리가트 건너편 길에서 서고, 204,205는 깔리가트 쪽에 서는데 길을 잘못잡으면 한참 헤매게 됩니다. 차장에게 '난 깔리가트' 간다고 말해두고 20분쯤 후에 눈짓을 보내면 됩니다. 그러면 아주 친근한 영어로 몇 정거장 남았다고 말해주죠. 그게 좀 쑥스러우면 머리에 꽃을 꽂은 아이가 있는 가족을 찾아보세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깔리 신에게 경배하러 가는 가족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내릴때 따라서 내려 졸졸 따라가면 됩니다.

 

깔리사원 옆에 붙어 있는 문이 큰 집이 목적지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특유의 냄새가 나지요. 자, 모두에게 인사를 하세요. '굿모닝!' 잠깐만요. 저쪽에 수염이 덥수룩하고 키가 큰 아저씨 한명이 보이죠? 저 사람이 바로 이곳에서 일한 경력이 7년 가까이 된다는 '안디'라는 아저씨 입니다. (저도 나중에 책을 보고서 알았죠.) 독일 사람입니다. 저 아저씨의 카리스마는 절대적입니다. 이곳에서 저 사람에게 대항할 사람은 아무도 없죠.(그래서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가끔 큰소리로 싸운답니다) 저는 아직도 저 사람이 무서워요. 하지만 가슴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독일 금융계에서 잘 나가던 사람이 우연히 이곳에 들렀다가 여태 장가도 안가고 봉사를 하고 있으니까요. 아예 이 근처에 집을 얻어서 산다고 하더군요.

 

자, 앞치마를 입고 가장 먼저 할 일은 아침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아침은 보통 뻥튀기 비슷한것을 주든지, 빵 몇조각에 버터를 조금 발라주는 정도입니다. 물론 짜이가 빠지지 않죠. 그릇에 빵을 네개씩 담는것이 가장 바쁜일입니다. 물론 바나나 껍질을 벗기는 일도 만만치 않죠. 참, 손은 씻었나요?!

 

아침을 모두 나누어주고, 밥을 먹여 주어야 합니다. 빵의 경우에는 짜이가 나올때까지 기다려서 조금씩 떼어 짜이에 적셔서 먹여주어야 합니다. 소화 기능이 형편없는 환자들이 대부분이라 메마른 빵을 먹는것은 오히려 고문입니다. 환자가 안먹겠다고 투정을 부려도 잘 구슬려서 끝까지 먹여야 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보약은 오직 먹는것 뿐이니까요. 저는 보통 '할아버지, 이거 하나만 더요, 이것만 먹고 끝내자구요' 하는 '하나만 더' 작전을 많이 씁니다. 그러면 거의 순순히 따라가죠. 가끔씩 바나나를 잘라 '�라, �라' 하면서 구슬리세요. �라요? 당연히 '바나나!' 입니다. 참, 그리고 스테인레스로 된 큰 컵을 들고 다니면서 외치세요. '빠니! 빠니! 절! 절!' 그러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컵을 내밀겁니다. 빠니는 힌디어로 물이란 뜻이고 절은 벵갈어로 물이란 뜻이죠. 이것만 알면 됩니다. 참, '아차!'도 알아두세요. 힌디어로 '좋다, OK' 등등의 뜻이 있는 말인데, 환자와 의사소통 할때 가장 좋은 단어 입니다. '네히!'는 필수입니다. 'No'란 뜻이니까요.

 

이제는 설거지를 해야죠. 설거지는 몇가지 단계가 있는데 뭐, 우리가 보통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게 끝날쯤엔 바로 옆에서 빨래가 시작됩니다. 저는 빨래 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습니다. 바로 제가 빨래 밟기의 전문가이기 때문이죠.

이 빨래 밟는 일은 어느정도 일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맨처음 헹구는 일을 하다가 1차 헹굼(발로 밟아서 헹굽니다)일을 이틀 정도 한후에 바로 "세제 섞어 밟는 일"을 맡았습니다. 빨래는 여러가지가 나오는데, 어쨌든 한번에 밟을 수 있을 만큼(시트의 경우에는 12개 정도, 바지의 경우에는 15개 정도)넣고 세제를 두바가지 넣습니다. 물론 물은 충분히 차 있어야 합니다. 제가 일을 전수 받을때는 1분정도 밟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건 이론일 뿐이죠. 1분씩 밟았다간 아마 오늘이 다 가기전에 빨래는 안끝날테니까요. 참, 세제가 모자라니까 조금씩만 사용해야 합니다. 나중에 모자라면 물을 더 타서 하게 되는데, 그러면 거품도 잘 안일죠.

 

저같은 경우는 "산골짝의 다람쥐" 두번 부를 정도의 시간을 밟습니다. 그리곤 빨래를 꺼냅니다. 물론 노래를 부를때는 격렬하게 발을 움직여 팔짝팔짝 뛰지요. 제가 흥얼거리며 일하는 것을 본 친구들은 모두 '헤이 코리언, OK?'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보기엔 약간 맛이간 얼굴로 팔짝팔짝 뛰고 있는 작은 체구의 동양인이 퍽이나 신기하겠지요. 하지만 이 일을 저들에게 양보할 수는 없어요. 그랬다간 세월아 네월아 하며 웃고 즐기느라 빨래가 제대로 되지 않죠.

 

참, 빨래는 어디서 그렇게 나오느냐구요? 제가 열심히 빨래를 밟고 있을때 다른 한쪽에서는 환자들을 목욕시키고 있을겁니다. 그쪽에 가서 도와주셔도 되죠. 대충 비누칠하고 물뿌리고 닦는 정도이지만, 길거리에서 몸에 구더기가 생기도록 방치되어 있던 이 사람들에겐 엄청나게 깨끗하게 씻는겁니다.

 

어쨌든, 빨래는 한시간쯤 뛰면서 땀을 쭉빼면 끝이나죠. 그리고는 물을 빼고, 발을 씻고 밖으로 나오는데, 이쯤되면 환자들에게 약을 주는 시간입니다. 땀을 닦고 물한잔 마신후에 환자들에게 갑니다.

 

저는 이곳에서 '마사지'를 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껍질이 바로 벗어질 것 같은, 그리고 내 손가락 굵기보다 조금 굵은 그들의 앙상한 다리를 주물러 줍니다. 제가 뭐 마사지를 해봤겠습니까? 그냥 할아버지 어깨 주물던 솜씨죠. 서양 자원봉사자들은 이 마사지를 잘 안해줍니다. 전혀 모르는 노인들과 살을 부딪친다는 것이 좀 껄끄럽겠죠. 그래서 저는 더욱 인기가 많습니다. '헤이 브라더! 헤이 브라더!' 여기 저기서 불러댑니다. 그러면 전 당당히 한국말로 외치죠. "아저씨! 좀 기다려요. 내, 이 할아버지 끝내고 갈테니."

 

참으로 재밌는것은 환자들마다 요구하는 마사지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환자는 머리를 다섯손가락으로 세개 눌러주는 것을 좋아하고(이 환자는 그럴때마다 '뷰티플! 뷰티플!'을 연발합니다) 어떤 환자를 다리를 세게 주물러 주길 원합니다. 그걸 다 기억하지 않으면 바로 환자의 비명이 들려오지요. 그리고 저는 환자를 눕혀놓고 등뼈를 따라서 지압을 해주는 것을 즐깁니다. 한번 누를때마다 '끙-'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오지만, 허리까지 모두 주물러주고 나면 모두들 좋아하더군요. 매일 누워 있으면 등과 허리가 쑤시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러다보면 10시 30분이 됩니다. 이름하여 '티 브레이크' 시간이죠. 손을 씻고 옥상으로 올라가면 맛있는 짜이와 함께 비스켓이나 오이 같은 간단한 부식거리가 있습니다. 짜이 한잔을 부어서 햇볕이 따스하게 드는 곳으로 갑니다. 이미 앞치마는 축축히 젖어 있습니다. 그것도 말릴겸, 깔리 사원을 지나다니는 사람들 구경도 할겸, 저는 혼자서 거리를 바라봅니다. 다른 친구들은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지만, 영어가 짧은 저는 그들의 대화에 끼기가 힘이 들죠. 하지만 저는 그런 조용한 휴식이 참으로 좋습니다.

 

달콤한 휴식이 끝났습니다. 이제 내려가서 점심 준비를 합니다. 점심은 아침보다 푸짐하지요. 물론 그 덕분에 일거리도 좀 많습니다. 점심 설거지를 끝내면
오전 타임의 일이 끝나죠. 일은 오후에도 있지만 제 체력상 오전만 해도 기진맥진 이거든요.

 

갈때도 버스를 타야 하는데 올때와 다르게 41B, 47B 중 둘중 하나를 타야 합니다. 아침에는 마더테레사 본부에서 탔지만 이제는 숙소가 있는 '서더 스트리트'로 가야 하니까요. 차장에게 '린제이' 앞에서 내려달라고 하면 됩니다.

린제이에서 내려서 조금 걸어가면 서더 스트리트가 보이죠? 그곳의 '티루파티'란 곳으로 갑니다. 거리의 포장마차인데, 이곳엔 볶음밥류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각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양배추로 만든 김치도 있긴 한데, 저는 그것만 먹으면 설사를 하기 때문에 절대 안먹습니다. 보통 볶음밥이나 볶음면을 먹는데 그 가격은 15(450원)루피 정도 입니다. 무척 싸죠? 그리고 이 집 주인과 종업원은 간단한 한국 인사말 정도는 합니다. 체구가 작은 주인 아저씨 보이죠? 그 아저씨는 '오빠~' 하고 불러야 합니다. :)

 

참, 너무 힘들고 그럴때는 티루파티 옆골목에 있는 '조조'란 곳에 갑니다. 이곳 2층에는 에어콘이 나오죠. 여기에서 '시즐러'란 것을 시키면 기가 막힌 요리가 나옵니다. 야채 시즐러가 38루피인가 하는데, 몇가지 야채가 지글거리는 돌접시(?)에 담겨서 나오죠. 지글거리는 소리가 일품입니다. 물론 한글로같은 구두쇠는 접대때(?)가 아니면 절대 가지 않았습니다.

 

밥을 다 먹었으면 숙소에 가서 샤워를 합니다. 몇번이고 비누칠을 해서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그리고 땀흘린 옷은 모두 빨아야죠. 자원봉사자의 수칙입니다. 잘못하면 감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내가 캘커타에서 묵던 센터포인트 게스트 하우스
세면장 앞(바로 안이 숙소)
오랫동안 기른 수염을 깎기전 찰칵
1998년 7월 29일
 

다시 밖으로 나옵니다. 한 숨 자면 좋겠지만 지금 잠이 들면 오늘 하루를 망칠것 같아서요. 별로 할일도 없이 서더 스트리트를 왔다 갔다 합니다. 오가다가 만나는 친구들과 인사를 합니다. 곳곳에 흩어진 한국 사람들을 만나 보는 것도 기분좋은 일입니다.

 

저의 하루는 바로 이렇습니다. 아무런 걱정도 없고 아무런 고민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무척 대단한 봉사를 한다는 생각이나, 사람들을 돕는다는 마음조차 없습니다. 너무나 행복하고 너무나 평온합니다. 저녁을 먹어야 겠군요. 티루파티 건너편 가게 층계에 걸터 앉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 어이, 오빠~ 프라이드 라이스 원!

 

 


나의 매끼 식사를 해결해주던 티루파티 식구들
1998년 8월 4일 떠나며 기념촬영

 

 

여행한 날:1998년 7월 26일
1998.10.5
한글로.

 

 

-=-=-=-=-=

 

옛날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는 것도 꽤 재미있네요.

 

이제는 인도 여행을 워낙 많이 하시니까, 그때의 추억과는 다른 체험을 하고 오시겠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행 그 자체인 듯 합니다.

 

나를 키운  것, 그게 바로 여행이 아닐까요?

 

 

2006년 7월 4일

한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