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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켓은 종교보다 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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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004년 3월 25일자

 

 

크리켓은 종교보다 성스럽다

[한겨레] 인도-파키스탄 화해 무드 크리켓 경기로 고조… 양국 국민의 엄청난 크리켓 사랑을 정치에 이용
델리= 우명주 전문위원 greeni1506@hotmail.com 지난해 열린 크리켓 월드컵에서 인도가 파키스탄을 이겼을 때 인도의 한 영자신문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라이브폴을 실시했다. “파키스탄을 이기는 것이 월드컵 우승보다 더 중요한가?” 대답은 ‘그렇다’가 훨씬 많았다. 생각해보라. 11억 인구를 가진 이 나라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역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뿌리 깊은 파키스탄과의 악감정을 말이다. 이는 한국이 한-일전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흥분 이상일지 모른다. 당연히 이것은 인도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에도 해당된다.

4월 총선을 앞둔 전략 인도 정부는 최근 무르익고 있는 파키스탄과의 화해 분위기를 더 고조시키기 위해 인도 크리켓 국가대표팀의 파키스탄 원정 경기를 계획했다. 이번 원정경기는 3월11일에 시작해 라호르·카라치·라왈핀디 등의 도시에서 경기를 치르고 4월18일 인도팀의 귀국으로 끝이 난다. 인도에서 크리켓은 단순히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종교다. 언어도, 인종도, 종교도 다른 11억 인도인을 동시에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크리켓 말고는 드물다. 인도 크리켓팀을 응원하는 동안 사람들은 카스트도, 계급도, 종족도 잊는다. 그리고 인기 있는 크리켓 선수는 바로 신이다. 그들은 명예와 인기와 부를 한꺼번에 거머쥘 수 있다. 가장 실력 있고 인기 있는 타자인 사친 텐둘카르는 연 수입이 500만달러에 달한다.

이런 크리켓을 인도의 정치인들이 이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애국심을 고취시킬 때도, 파키스탄과의 적대 감정을 정치에 이용할 때도 그들은 항상 크리켓을 이용해왔다. 인도 크리켓팀이 파키스탄에 가는 것은 14년 만이다.

잠무 카슈미르에서 군사 교전이 고조된 때도 바로 14년 전이었다. 2001년 12월, 테러리스트들의 인도 국회의사당 공격 이후에 인도 정부는 국제대회를 빼고는 파키스탄과 크리켓 경기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002년 여름, 인도와 파키스탄은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갔으나 미국의 개입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크리켓은 군사 전쟁의 스포츠 대리전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크리켓 선수들은 국가적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해줄 전사가 돼갔다. 인도 팀이 2003년 크리켓 월드컵에서 파키스탄 팀을 이기던 날, 인도 전역은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었다.

인도와의 전적에서 우위에 있으면서도 월드컵에서는 늘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파키스탄은 당장 크리켓 경기를 재개하자고 인도에 제안했다. 인도가 거절하자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인도는 질까봐 겁내고 있다”고 비웃었다.

이번 크리켓 경기의 이면에 깔려 있는 것은 4월 총선을 앞둔 정부의 전략이다.

파키스탄과의 대결에서 분출될 애국심이 보수 힌두정당인 여당에 대한 투표로 이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인도 크리켓팀은 “여러분은 승자가 될 것입니다”라는 바지파이 총리의 격려를 들으며 비행기에 올랐다. 또 정치적·외교적 요인 외에도 경제적인 문제도 결정적이다.

인도 선수들, 보안 걱정에 괴로워

지난 몇년간 보안상의 문제 때문에 파키스탄에서 몇번의 크리켓 경기들이 취소됨에 따라 파키스탄 크리켓위원회는 극심한 재정난에 빠져 있다. 인도 생각에도 이것은 매력적인 장사다. 이번 원정은 방송과 광고 수입만 해도 1500만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삼성전자 후원으로 이번 대회는 ‘2004 인도-파키스탄 삼성컵 크리켓대회’로 이름지어졌다.

그러나 이번 파키스탄 원정에 대한 선수들의 마음속은 복잡하다. 먼저 보안 걱정이 선수들을 괴롭히고 있다. 2년 전 파키스탄에서는 뉴질랜드 크리켓팀이 묵고 있던 호텔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그 이후로 많은 팀들이 보안상의 이유로 파키스탄 원정을 취소하거나 일정을 축소해왔다. 특히 인도 선수들은 이슬람 무장단체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인도팀 최고의 타자인 사친 텐둘카르와 주장인 소우라브 강굴리가 이슬람 무장단체인 라쉬케르-에-토이바의 공격 대상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선수들의 걱정을 잠재우기 위해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팀들에게 국가원수에 준하는 수준의 보안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선수들은 그 발언이야말로 파키스탄 방문이 위험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지난 연말 파키스탄 대통령이 두번의 암살 시도를 가까스로 모면한 예를 들며 파키스탄의 보안 체제에도 선수들은 미덥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자신들의 대통령조차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선수들을 보호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런 우려를 안고 지난 3월10일 파키스탄에 도착한 인도팀은 언제나 수많은 경찰들과 보안요원들에 둘러싸여 있다.

훈련을 할 때나 경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도착 다음날 치른 연습경기에서 입장한 관중은 300명에 불과했으나 보안요원은 2600명에 달했다. 관중 1명당 보안요원이 9명씩 배치된 셈이다. 또 선수들의 걱정은 극심한 심리적 부담으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파키스탄과 경기를 할 때면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기대가 큰 부담이 된다고 선수들은 고백한다. 또 많은 인도 팬들이 경기를 위해 파키스탄을 찾겠지만 주최국 관중에 견줘 턱없이 적은 수이다. 엄청난 수의 파키스탄 ‘붉은 악마’들로 둘러싼 경기장에서 인도 선수들이 느낄 부담과 어려움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경기의 승패에 따라 흥분한 관중들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1999년 콜카타에서 벌어진 인도-파키스탄 크리켓 경기에서 인도팀이 지고 있자 흥분한 인도 관중들은 스탠드 곳곳에서 불을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결국 모든 관중들이 경기장 바깥으로 쫓겨난 가운데 두 팀은 경기를 마쳤다.

선수들의 걱정이야 어찌됐든 양국 국민들은 이번 대회를 손꼽아 기다렸다. 수많은 인도 크리켓 팬들은 인터넷을 통해 입장권을 구입한 뒤 비자 발급을 위해 연일 파키스탄 대사관 앞에 장사진을 이뤘다. 파키스탄의 열기도 만만치 않아서 3월6일에는 입장권을 구입하기 위해 몰려든 팬들과 경찰의 충돌로 입장권 판매가 중단되기도 했다. 이틀 뒤 재개된 입장권 판매에서 2만1천장의 입장권이 몇 시간 만에 동이 나버렸다.

다행히도 두 나라 국민들은 예전보다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크리켓 월드컵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맞붙었을 때, 한 파키스탄 영자신문은 “인도 대륙에서 전쟁을 게임처럼 생각하고 게임을 전쟁처럼 생각하는 것은 비극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이제 양국 국민들은 크리켓을 전쟁이 아닌 단순한 게임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언론들도 언제나 단순한 크리켓 이상이었던 양국간의 경기를 이제는 크리켓 그 자체로 즐기자고 당부했다.

“단순한 게임으로 즐기자”

이런 변화는 국민들 사이에 양국간 관계 개선의 필요성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분리 독립 이후 양국간의 적대 감정은 두 나라 모두를 경제적·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바지파이 총리가 처음 적극적인 평화 재개 움직임을 보였을 때 그것이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반대한 강경론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대부분의 인도 국민들은 큰 지지를 보내고 있다. 국민들은 파키스탄과의 관계 개선으로 더는 막대한 군사비용이 지출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또 카슈미르에서 계속되고 있는 무장 충돌에도 국민들은 이제 지쳐버렸다. 이번 경기의 결과에 따라 인도 대륙에서 크리켓은 대결이 아닌 화해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인도 선수들이 무사히 경기를 마치고 귀국하길 바라고 있다. 물론 승리까지 안고 돌아온다면 더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