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의 낙서장/잡다한 스크랩

[스크랩] 제 예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다음블로그한글로 2006. 4. 18. 22:25



 

나는 소위 이 사회에서 말하는 장애인이다.
그것도 그냥 장애인이 아닌 전신마비의 중증장애인...

7년전 저녁의 늦은 퇴근길, 회사동료차를 타고 회사 정문을 나선지 채 2분도 되지 않은 급커브 길에 커브를 틀지 못해 차가 전복되면서 목을 다쳐 목이하로 내려오는 신경이 끊겨서 그순간부로 전신마비장애인이 되었다......사고는 과중한 업무로 인한 피로운전이었다.

설상가상 회사동료는 책임보험만 들고 있었고, 퇴근길 교통사고는 산재적용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1년여의 병원생활후 나에게 남겨진것은 휠체어 한대와 목신경 손상으로 인한 전신마비장판정의 장애인등록증이었고, 그이후 난 장애와 경제난에 부딪치며, 살기위해 치열한 일인서바이벌게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장애인이동권연대투쟁중에..."

 

전신마비장애...
사고당시 차가 전복이 되면서, 어딘가에 목을 부딪쳤고, 그 순간 목뼈가 으스러지며, 목이하로 내려오는 신경의 손상으로 손과 발이 마비되었다. 하지만 장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대,소변기능도 마비되어서 소변이 차면 누군가가 방광에 줄을 집어 너어서 소변을 강제로 빼내야 했고, 대변또한 3일에 한번씩 약을써 침대에 누워서 봐야하며, 그 모든것은 연로하신 부모님이 해주셨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한 복병이 있었다. 욕창...목이하로는 감각이 없다보니 한 자세로 오래 누워있거나, 휠체어에 오래 않아있으면, 눌려있는 부위의 피가 통하지 않아서 살이 괴사하면서 천천히 썩어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썩어들어가도 마비된 감각으로 인해서 통증도 느끼지 못하고, 그런 중증장애인의 사망 1위가 심한 욕창때문이라고도 한다.

 "사고전 취미활동으로 암벽등산 처음 배울때"

"사고전 취미활동으로 한 스킨스쿠버"

사고당시 내 나이가 27살이었다.
가장 활발하고,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누군가의 도움없시는 물한모금도 마실 수없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이 장애의 특성은 정신은 멀쩡하고, 별다른 통증도 없는데 아무것도...가벼운 종이한장 드는것도 할 수없다는 것인데...한마디로 육체의 감옥에 갇혀버린 꼴이 되었다.
퇴원후 꼬밖 1년반을 침대에 누워서 살았다. 그 당시는 컴퓨터가 많이 보급되지 않다보니 아침에 눈을뜨면 으례 tv를 트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밤늦게 tv를 끄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했고, 그렇게 1년을 넘다보니 서서히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정말로 무의미한 인생으로 사는것이 사는게 아니었고, 창살없는 감옥의 독방에 갖혀사는 느낌이었다.

빠삐용...
그이후 나는 어떻해서든 그 독방(?)을 탈출하고 싶었다.
저 창문밖의 많은 사람들은 자유스럽게 자기의 생활을 누리면서 직장도 다니고, 영화도 보고, 가고싶은 곳도 다니며 먹고싶은 음식도 가까운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그런 평범함을 즐기지만, 나는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현실에 조금씩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장애인이 된 이후 누구하나 장애인복지나 시책에 대해서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알아볼 곳도 없었다.

그래서 시청과 보건소에 연락하여 자원봉사자 연결을 몇 차례 부탁하였지만 ?알았으니 기다려라?는 소리와 함께 시간은 지나갔지만 아무 소식도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싼 가격의 컴퓨터를 구입하면서 인터넷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전까지만 하여도 장애 관련 정보 및 복지 시책을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아 알지 못하였으나 인터넷을 계기로 그때까지 몰랐던 많은 장애관련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우리나라 장애문제와 복지 시책이 경제 성장에 비해 너무나도 열악한 조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내의 복지 관련 서적과 장애관련 복지와 역사에 대해 인터넷을 이용하여 나름대로 공부를 하게 되었고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고민도 하게 되었다.

그 이후 많은 장애관련 기관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의를 하였지만 대부분 혼자서 활동 가능한 장애인만을 선호하였고, 나와 같은 중증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또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 보니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장애관련 단체나 장애관련 서비스가 주로 서울시에 집중되어 있어 경기도 이천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어떠한 활동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게 몇 달을 다시 고민하게 되었고 생각 끝에 2001년 2월, 서울 수유리 국립재활원에 재활 치료로 입원 신청을 하고, 그해 4월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재활치료도 중요하지만 사회활동을 위한 목적이 크기 때문에 입원 즉시 내가 가지고 있던 조금 남은 돈으로 활동 보조인을 고용하였고 그렇게 사회생활의 첫 걸음을 시작하였다.

우선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 다시 장애관련 단체를 직접 찾아가 상담을 하였고 처음으로 시작한 일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주관과 서울시의 후원으로 서울시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장애인의 올바른 인식 전환을 위한 일일교사를 하게 되었다.

내용인즉 매주 토요일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3교시 수업을 진행하였고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 장애체험, 체험 후 토론식으로 진행을 하였다. 4개월여 동안 서울시 11개 초등학교가 참여를 하여 장애인의 올바른 인식개선에 대한 많은 성과를 얻어 자료집으로 엮어 전국 초등학교에 배포 되었다.

그 이후 장애인의상연구소 주관과 서울시 후원으로 장애인 패션쇼도 참가하고 그와 관련된 크고 작은 장애관련 행사에 참가를 하였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동권연대와 정립회관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진행중인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세미나를 접하면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드디어 찾게 되었다.

바로 나와 같은 중증장애인도 사회적인 배려와 정부의 정책만 지원된다면 비장애인과 같이 평범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라는 중증장애인 모임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나는 홍보담당을 맏아서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알리기 위해서 논문을 찾아 자료를 만들어서 장애인 정책담당자를 만나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 필요성을 알렸다.

그러나 국립재활원을 퇴소하면서 다시 이천으로 내려오게 되면서 경제적 어려움과 지방의 특성상 다시 활동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의지가 있다 하여도 전신마비라는 장애는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높은 벽과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포기할 수만은 없었다.

"장애인의상 패션쑈에서 ..."


"장애인이동권연대 집회도중"


"중증장애인 인터넷서바이벌 대회도중"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더 많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포기를 한다면 평생을 창살없는 감옥과 같은 방에서 절망과 후회를 하며 지낸다는 것은 정말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나가서 활동을 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것은 바로 나의 활동을 보조해줄수 있는 활동보조인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중증장애인의 활동보조서비스의 개념과 지원이 안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의 활동을 도와줄분을 찾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간병인협회에서 간병인을 고용하여야 하는데 한 달에 150만원이란 비용은 나에게는 엄두도 내지 못할 비용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후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끝에 직접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보건복지부에 중증장애인에 대한 활동보조비도 알아보고, 전경련에 상무님도 만나고, 시청에 지역사회 후원도 알아보고, 여기저기 장애인단체에 문의도 해보고, 시민단체에 호소도 해보았다.

하지만 후원과 기부문화의 부재속에서 먹고 사는 문제도 아닌 단지 사회활동의 필요성만으로는 힘들고, 또한 일반 개인에게는 지원이 어렵다는 말과 함께 어떤 사람은 ?그런 중증의 장애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그냥 집에서 요양하다보면 좋은날이 올 것이니 편하게(?)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알아보았지만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는 안되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고심끝에 스스로 벌어서 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6개월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보험업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사고 전 서울에서 2년여간의 영업활동도 해보았고 보험이란 대중화된 상품에 무형의 상품이라서 어느 정도 교육을 통한 지식만 갖춘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 생겼고, 내가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었다보니 누구보다 더 보험의 중요성을 알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만들어 무턱대고 삼성화재 본사에 찾아갔다. 본사 앞에서 담당자와 통화한 후 만나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전해준 다음에 나도 할 수 있으니 한번만이라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그런데 한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바로 활동보조인지원이였다. 담당자는 알았다고, 한번 상의 후 연락을 주겠다고 하였고, 그렇게 다시 이천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생각해도 쉽게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 대뜸 찾아와서는 일하겠다고 하고서 거기다가 조건까지 내세우니 내가 생각해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서 이천에 있는 삼성화재에 전화해 소장님을 만나 다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전해드린 후 다른 직원들과 똑같은 환경과 조건에서 일할테니 저에게 한 번의 기회만 주십시오. 하고 호소했다. 소장님도 처음엔 검토 후 연락을 주기로 했지만 한달 후, 연락이 없자 다시 찾아가서 부탁드렸다. 그리고는 얼마 후 11월에 수원 보험연수원에서 2주의 교육과 자격시험이 있으니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정말 뛸(?)듯이 기뻤다. 비록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지만 기회를 주엇다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감사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수원을 왕래하면서 교육을 받기 위해서 차도 있어야하고 활동보조인이 당장에 필요했다. 그런데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 라고 했던가! 1년 전에 한 장애인 모임에서 만난분의 연락이 왔다. 현재 미인가 장애인시설에서 생활교사로 근무하다가 대학원의 사회복지 공부로 인해서 잠시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사정을 전하고 월급의 일정부분을 드리는 조건으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분은 잠시 고민끝에 허락하였고, 그렇게 직업전선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사무실에서 업무중에...손을 사용할 수없어서 마우스스틱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2003년 12월, 사고 후 거의 5년만에 중증장애로 다시 직업을 같게 되었고. 2004년 1월 첫 월급을 받았을 때는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추운 겨울 온 몸이 꽁꽁 얼면서도 고객을 만나러 다녔고, 전신마비장애로 어깨아래로는 땀이 나지 않아서 체온이 쉽게 올라가 수시로 일사병을 느끼면서도 고객을 만났다.
항상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영업하느라 계단은 올라가지도 못하면서 매달 매달을 최선을 다해서 활동했다...

그러길 어느새 2년반이 지나 따뜻한 햇살과 함께 푸른 새싹이 돋는 4월의 중순... 봄이 찾아왔다. 아직까지는 많은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의 직업적 자립이 성공한 것도 아니지만. 항상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과 나의 목적이 단지 돈을 번다기보다 중증장애인도 정부의 정책지원과 사회적 배려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직업을 가지고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몸으로 시위(?)를 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일각에서는 ?그 몸으로 얼마나 할 수 있겠어? 라며 얼마 못가서 그만 두겠지 하면서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 솔직히 나도 정말 잘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무리해서 오래 앉아 있으면 욕창도 생기고 가끔 옷에다가 소변과 대변이 저절로 나와서 난처할 때도 있었다. 때론 무리한 활동으로 너무 피곤해서 아침에 휠체어 타기가 너무나도 힘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전신마비장애가 있다고 해서 평생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안에서 누워서 지내는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조금 힘들어도 사회로 나가서 내 할일을 찾아서 활동하는게 낫겠습니까?" 실패는 두렵지 않다. 힘들어도 방안에서 아무의미 없이 누워서 사는 것보다 조금 힘들어도 꿈과 희망을 가지고 밖에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힘든 것은 오히려 나에게는 즐거운 일이고 행복하다.

나는 내장애가 심하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길도 점점 더 힘들어질것이란 것도 안다. 결혼을 한다는 것도...아이를 가진다는 것도 나에겐 힘들다. 그리고 부모님이 점점 더 나이가 드셔서 나를 돌봐주실 수도 없을때는 결국 장애인시설로 들어갈 수밖에 없겠지만...난 그때까지만 이라도 열심이 살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나에게 있어서 욕심일런지....

 

"나의 애마 전동휠체어를 타고 KBS서점 앞에서..."

 

너무나도 지루한 제 사연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매년 4월20일은 장애인의 날이라고 합니다. 평범했던 삶에서 한순간의 실수(?)로 장애인이라는

친구를 얻게 되었지요...그래서 어느 순간 장애인의 날에 저도 포함되게 되었죠...장애인의 날.....

제가 느끼는 장애인의 날은 평소에는 안보이다가 1년에 한번쯤은 장애인도 이나라에 살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날인것 같습니다. 그러다 하루가 지나면 다시 잠잠해 지지요...그래서 나같은 놈(?)도 있다~~~ 하고 입에 막대기 물고서 열나게 글한번 써봤습니다. 이젠 입아퍼서 더이상 쓰지도 못하겠네요.

 

여러분 힘드시나요? 저같은 놈(?)도 이렇게 사는데...못 할게 뭐 있겠습니까? 행복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여~러~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여~~~~~^^:::

출처 : 기타
글쓴이 : 코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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