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와 한글

한글 과학화의 선구자, 세벌식 타자기 - 고 공병우 박사님

다음블로그한글로 2006. 10. 8. 23:24

"한글날의 국경일 지정을 축하합니다"

 

한글날의 가치를 "괜히 노는 공휴일"로 지정한지 십여년..
이제 다시 제자리를 찾아서 우리나라 5대 국경일로 지정된 "한글날"

 

한글의 생일을 축하하며

 

세벌식 타자기, 자판을 만드신
한글 과학화의 선구자

고 공병우 박사님을 소개합니다

 

고 공병우 박사님 (1906-1995)

공병우 박사님 자서전의 표지사진
(한글학회에서 가져왔습니다)

 

 

한글로와 한글


- 올해부터 한글날은 국경일

- 한글을 빛낸 위인들

- 한글 과학화의 선구자 - 공병우 박사님

 

 

 

세벌식 자판을 아십니까?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글자판(키보드)의 배열은 두벌식(2벌식이라고 쓰였을 경우에도 '두벌식'이라고 읽는다) 자판으로 국가 표준 자판이다. 바로 아래와 같은 자판인데, 첫번째 열의 자음 배열이 "ㅂㅈㄷㄱㅅ'라서 예전에는 "바지들고서" 자판이라고도 불렀다.

 

▲  표준 자판, 두벌식 자판

 

(이곳의 모든 자판 사진은 세벌식 자판을 오래전부터 지원한 워드프로세서
한글 2002에서 캡처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하지만, 윈도우의 한글 입력기 속성을 살펴보면.. 한글 자판이 두가지 더 있다. 세벌식 390자판이란 것과 세벌식 최종 자판이란 것이다.

 

▲ 윈도우의 한글 입력기 속성 메뉴

 

세벌식 자판의 종류나 차이는 제법 복잡하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간단히 그 모양을 살펴보면...

 

▲  세벌식 최종 자판 (공병우 최종자판)

 

 

우리가 사용하는 자판과는 달리 "한글의 창제 원리"에 따라 "초성,중성,종성" 글쇠(키)가 따로 되어 있다.  있는 것이 받침들, 가운데에 중성(모음)이, 오른쪽에 초성(자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과학적인 세벌식 자판

 

세벌식 자판은 이미 1949년 공병우 박사님에 의해서 개발되었고,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박사님은 계속해서 "더 과학적이고, 더 빠르고, 더 외우기 쉬운" 자판 연구를 해오셨다. 그러면서 많은 자판들이 개발되어 왔으며, 그 결과물들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세벌식 자판의 특징은 "빠르다"라는 것이다. 이미 "속도 타자기"라 불리는 타자기로서 속기를 하지 않고도 세벌식 타자기만 있으면 얼마든지 문서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약점은 "글자 모양이 울퉁불퉁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요즘 흔히 보는 "샘물체"나 "안상수체"처럼 윗쪽은 나란하지만 아랫쪽이 울퉁불퉁한 "빨랫줄 글꼴"이란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1969년에 타자기 표준이 정해질때, 글자 입력은 훨씬 느리고 복잡하지만 글자 모양이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네벌식 타자기"가 표준으로 정해진다.

 

그리고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1982년에 두벌식 컴퓨터 자판이 표준으로 채택되고, 타자기 역시 1985년에 두벌식으로 표준 자판이 된다.

 

두벌식 자판은 모두들 알다시피 "우리나라"를 치는 동안에 "울"자가 나타났다가 "ㅣ"를 치면 "우리"로 바꾸는 "도깨비불 현상"이 있으며, 수동/전동 타자기에서는 "울"자까지 치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ㅣ"를 치면 드디어 "우"자가 찍히는 "시간차"가 생기는 불편함이 있다.

 

세벌식 자판은 글쇠수가 두벌식 보다 많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증명하고 1992년에 문화부에서 (주)한글과 컴퓨터에 연구 의뢰를 한 <한글코드와 자판에 관한 기초 연구>등의 자료에서 속도와 정확성, 과학성 등이 입증된바 있다.

 

하지만, 오늘까지도 세벌식 자판은 표준으로 정해지지 못했지만, 뜻있는 프로그래머들의 노력으로 인해 "윈도우"나 "한글 워드프로세서"등에서 지원이 되고 있다. (한글 워드프로세서의 초기 개발자들이 세벌식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참고] 이미 미국의 경우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비과학적 자판의 대명사인 영문 QWERTY자판(쿼티 자판 - 왼쪽 위 영어 배열이 Q.W.E.R.T.Y인데서 유래)와 함께, 과학적 자판인 드보락(DVORAK - 드보락 박사가 고안해 냄)자판이 표준으로 정해져 있다.

 

▲  미국 표준 자판의 하나 (Dvorak자판)

 

 

 

 

우리나라 최초의 안과 의사 그리고..

 

고 공병우 박사님의 약력은 너무나 길고도 다채롭다.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 우리나라 최초의 안과의사 (1936년 학위) - 공안과 설립후 계속 안과 의사로 일하심

- 국산 콘택트랜즈 최초개발 (1959년)

 

- 맹인용 점자 타자기 개발 (1971년)

- 맹인용 한글 워드프로세서 개발 (1989년)

 

- 세벌식 타자기 첫 발명 (1949)

- 한영 겸용 타자기 최초 개발 (1972)

- 3단 한영 타자기 개발 (1972)

- 한글 문화원 설립 (1988) - 한글 과학화에 힘쓰심

 

이 밖에도 한글 소프트웨어 개발, 사진가 등의 약력이 있는데, 자세한 것은 글 끝머리에 정리해 두었다.

 

고 병우 박사님을 생각하는 까닭

 

고 공병우 박사님의 한글 문화원에서는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자료를 보내주곤 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도 그 자료를 받아보곤 했는데, 정말 너무나 소중한 자료들이었다. (지금도 일부 자료는 보관하고 있다)

 

당시에 공병우 박사님께서 하신 운동은, 내 생각에는 다음과 같았던 것 같다.

 

1. 한글 세벌식 자판 보급 (한글 과학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더 빠르고 과학적인 자판을 마다하는 일은 한국의 최고 고집쟁이라고 알려진 당신이 절대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한글만 쓰기 운동 (한글 전용운동) - 이제는 이 운동을 할 필요도 없이 고인의 뜻대로 되어 버린 셈이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의 신문들은 "세로쓰기, 한자 혼용"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던 때였다. 각종 서적들도 "고상하다" 싶으면 세로 쓰기에 한자 혼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세태에 계속해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애쓰셨으며, 이제는 또다른 폐해가 오긴 했지만, 대부분의 출판물과 대부분의 인터넷 사이트가 (당연히) 한글만 쓰기 운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장기 기증의 선구자

 

박사님의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1989년)>에 보면, 박사님의 유서 이야기가 나온다. 미리 유서를 써 놓으셨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시신을 기증하고 친지들에게도 알리지 말 것. 전 산은 모두 불우한 이웃이나 장애우를 위해서 사용할 것 등이었다.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돌아가셨을 때에 그 유언대로 집행이 되어서 의과대학의 실습용으로 시신이 기증되었다고 한다.

 

정말 항상 세상을 몇십년 앞서 살아가신 분의 귀감이 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탄생 100주년을 기리며..

 

한글날이라고 많은 언론에서 한글 관련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10월 9일이 지나고 나면, 내년까지는 아마 한글에 대한 기사를 찾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올해 한글날이 <국경일>로 지정되고, 각종 행사와 좋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고 공병우 박사님이 가신지도 10년이 넘어가고 있고, 올해가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나는 생각해본다.

 

1988년의 어느 날, 공병우 박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한글 과학화"를 생각했던 고등학생이, 지금은 얼마나 자주 "한글"에 대해서 고민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는지 말이다.

 

나의 대화명인 "한글로(hangulo)"는 바로 "한글로 쓰기 운동(한글 전용 운동)"이란 뜻으로, 역시 공병우 박사님의 글을 읽고서 PC통신 등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사용한 나의 또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나는 그 이름 값을 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된다.

 

이런 반성은 나 혼자 뿐이 아니라, 공병우 박사님을 모르던 사람들, 잊고 지냈던 사람들, 그런 세상이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조롱하던 많은 사람들... 모두가 해야할 숙제인 듯 하다.

 

2006년 10월 9일

한글날. 한글로 씀

 

 

 

<덧붙임>

 

★ 공병우 박사님께서 설립하신 한글문화원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http://www.moonhwawon.org/

한글문화원

 

 

한글문화원에 남아있는 고 공병우 박사님의 글 한 편을 소개한다.

 

 

제 목:국가흥망을 좌우하는 한글전용
보낸이:공병우(Kongbw) 1993-04-19 14:51 조회:161 1/7

국가 흥망을 좌우하는 한글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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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병우(한글문화원장)

지난 16일 동아일보 독자란에 송 기헌 교수님은 우리말 70 퍼센트가 한자어이기 때문에 한글표기 땐 의미 혼란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의 예를 들여 한자 혼용을 주장하셨다.
송 교수님이 예를 들어 보인 바와 같이 글자생활에 혼란이 있다는 사실에는 나도 100%로 동감한다. 그러나 그런 혼란은 한자혼용 생활에서 한글전용 생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피할 수 없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 혼란을 벗어나는 길은 하루빨리 한글전용 생활을 발전시키는 길뿐이다. 그런 과도기의 혼란을 이유로 한자혼용을 주장한다면 한자어를 더욱 늘리게 되어, 글자생활의 혼란이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한자어는 우리 조상들의 사대사상으로 빚어진 중국식 외래어로, 우리말을 위축 또는 말살시켜 왔다. 따라서 한자어를 하루빨리 줄이는 동시에 우리말로 바꾸는 과업이 우리 나라 과학 문화 발전을 촉진하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한글전용을 실천하려면, 먼저 대중적인 신문, 잡지, 공문, 명함, 명패, 간판 등 일상생활에서부터 한자어 사용을 줄이고 우리말을 사용해야 한다. 만일 한자나 로마자를 기록할 필요가 꼭 있을 때는 한자나 로마자를 괄호 속에 넣는 방식으로 하여야만, 한자나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한자어는 줄어들고 우리말과 글은 발전할 것이다.

일본은 수백 년 전부터 일본 가나를 활용하여 한자를 일본어로 바꾸는 동시에, 반드시 한자를 가나와 같이 기록함으로써, 누구나 글을 읽을 수 있는 일본 고유의 한자(Japanese Kanji)로 만들었다. 이렇게 일본은 소리글자인 가나의 힘으로 중국 한자를 일본식 한자로 만들어 사용하였기 때문에, 동양 어느 나라 보다도 먼저 문맹을 벗어나 선진국으로 발전하였다. 우리는 일본 가나보다도 두 배나 과학적인 한글을 천대만 하면서, 중국식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중국의 속국이 되었고, 일본에게 나라가 망한 적이 있었음에도 아직도 한자 사용을 주장한다면 일본이나 중국에 또 다시 속국이 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자혼용은 일본 문화 침략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한자와 가나를 혼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한자혼용을 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일본이 일본식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우리가 외국 글자인 중국식 한자를 사용하는 것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는 사실, 즉 일본인이 사용하는 한자는 일본 문화 발전에 훌륭한 무기 구실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는 마약 구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처사이다. 일본이 만일 가나 대신 한글을 가졌더라면, 로마자보다도 먼저 세계적인 글자로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한자 문화권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되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한자를 우리말화하면서 한글전용으로 한글을 발전시킨다면, 머지않아 한글이 세계적인 글자로 발전할 것이다.

일본과 중국은 모든 생활 방식을 서양식으로 바꾸었고, 글자까지도 로마자로 바꾸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 방식은 서양식으로 바꾸었지만, 글자만은 로마자보다도 우수한 한글이 있기 때문에 바꾸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민족의 보물을 500여 년 동안 천대만 해 왔고, 지금은 더욱 천대하고 있으니, 이대로 간다면 한글문화가 발전하지 못하여, 결국 한자의 해독과 로마자 문화 침략이 현재보다도 앞으로 더욱 심한 꼴이 될 것이다. 외국의 문화 침략은 위대한 한글로 민족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만 막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글자생활을 개혁하여 한글 문화를 발전시켜야만 한다.

첫째, 사람이름과 고유명사(예: 김영삼,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한글로 쓰고, 로마자나 한자로 기록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괄호 속에 로마자로 기록하는 것이 우리말을 정확히 나타내는 글자생활이다.(자세한 내용은 동아일보 4월 10일자, '나의 의견'란 참고)

둘째, 신문, 잡지, 공문, 문패, 명함 등 일상생활에서 한글전용을 단행할 것이다. 꼭 필요할 때만 괄호 속에 한자나 로마자를 넣는다. 이것은 일본이 수백 년 전부터 해 오는 방식으로 한글을 주인으로 외국 글자를 종으로 하는 방식이다.

중국은 자기네 글자와 로마자로 글자생활을 하고 있으며, 일본은 수백년 전부터 한자를 모두 일본 가나로 번역하여 일본 고유의 한자로 만들었고, 지금도 일본식 한자어로 바뀌지 않은 어려운 한자는 반드시 가나를 함께 기록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일본말을 로마자 화하는 운동은 중국보다도 백년 이상 앞서 시작하여, 현재는 국민학생들이 읽는 로마자로 만든 일본말 신문을 보급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셈틀(computer)에서는 일본말을 로마자로 입력하면 일본 한자와 가나로 번역되어 나온다고 한다. 일본은 한문 타자기와 한문 식자기를 최초로 개발하여 동양 각 나라에 보급한 나라이다. 일본말 로마자화도 기계화도 컴퓨터화도 동양에서 가장 앞서가고 있는 일본의 글자 정책에 대한 역사를 읽어보면, 우리 나라는 일본의 100년 전 글자생활보다도 뒤떨어진 원시적인 글자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한자어를 빨리 우리말로 번역하는 운동과 한자를 사용할 경우에도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먼저 기록함으로써 '한글사랑이 나라사랑'이란 선각자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나라는 한글의 위대한 과학성으로 말미암아, 과학자, 종교인, 예언자, 도인들의 예언과 같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우수한 과학 문명국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1993. 4. 19.

 

 

 

고 공병우 박사님 약력

 

한글학회 www.hangeul.or.kr 에서 가져옴

 

http://www.hangeul.or.kr/cgi-bin/hanboard/read.cgi?board=person_grt&y_number=4&nnew=1


 번호: 50
 갈래: 한글 문화 인물
 2003/6/21(토)
 읽음: 2703
 

 공병우  

1906. 12. 30. 평안북도 벽동군 성남면 남성동 388번지에서 나다.
1926. 평양 의학 강습소를 수료하다.
1926. 10. 조선 의사 검정 시험에 합격하다.
1927. 신의주 도립 병원 내과 및 검사실에 근무하다.
1929. 경성 의학 전문학교 세균학 교실에서 세균학을 공부하다.
1930. 경성 의학 전문학교 부속병원 안과에서 근무하다.
1934. 경성 대학 병리학 교실에서 안과 병리를 연구하다.
1936. 해주 도립 병원 안과 과장으로 근무하다.
1936. 7. 일본 나고야 제국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다.
1938. 9. 공 안과 의원을 개설하다(서울시 종로구 서린동).
1943. 1. 《소안과학》를 펴내다.
1947. 5. 한글 타자기 연구 개발을 시작하다.
1949. 10. 국회 의장상 받음(전국 과학 전람회에 한글 타자기 출품).
1949. 11. 고성능 한글 타자기를 처음으로 발명하다.
1950. 3. 3벌식 '공 속도 한글 타자기'를 최초로 개발하고 이와 함께 3벌식 글씨꼴을 개발하다.
1954. 6. 쌍촛점 타자기를 발명하다.
1956. 10. 안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다.
1958. 10. 대통령 표창 받음(한글 타자기 발명 공로).
1959 1977. 재단법인 한글 학회 이사를 지내다.
1960. 3. 서울 맹인 부흥원(서울 강동구 성내동)을 설립하고 맹인 점자 교육과 한글 타자 교육을 실시하다.
1962. 3. 한글 학회 부설 한글 기계화 연구소를 발족하다(한글 기계화지 첫 발간).
1962. 8. 대통령 표창 받음(건국 공로 식산 표창장).
1965. 5. 한국 콘택트 렌즈 연구소를 설립하다.
1965. 10. 한국 최초로 약시 검안을 위한 약시부를 신설하다.
1967. 9. 한글 텔레타이프를 개발하여, 한국 치안국과 통신사에 설치 활용하게 하다.
1968. 3. 한 영 겸용 타자기를 발명하다.
1968. 4. 공병우 타자기 연구소를 설립하다.
1968. 10. 문화공보부 장관상 받음(한글 전용 공로자상).
1971. 8. 점자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다.
1971. 12. 중국 주음 부호 타자기를 발명하다.
1972. 3. 한국 맹인 재활 센터를 설립하여, 중도 실명자 재활 교육을 시키다.
1972 1977. 한글 학회 정기 간행물《한글 새소식》편집 위원으로 위촉, 공 병우 3벌식 한글 타자기로 입력 편집하다.
1974. 3. 외솔 문화상 받음(한글 문화 발전 공로).
1975. 10. 은장 박애장 받음(대한 적십자사).
1977. 3. 사진 연구를 시작하다.
1978. 5 6. 《공병우 사진집》을 발간(꽃, 6월의 모습, 나의 사진집, 물, 단풍, 하늘, 습작)하다.
1979. '한 일 국제 맹인 타자 경기 대회'를 열다.
1979. 3. 서울 적십자사 총재 표창 받음(모범 납세자).
1979. 10. 대한 적십자사 총재 표창 받음(특별 회원으로 적십자 사업 발전에 기여).
1979. 11. 일본 '가나'와 로마자 겸용 3단 타자기 발명 특허 등록하다(일본국).
1980. 1 5. 공 병우 사진 전시회를 개최하다(서울, 제주, 광주, 부산, 대구 등).
1980. 2. 종로구청장 표창 받음(새마을 저축 증대 기여).
1980. 5. 평안북도 첫 문화상 받음(첫 평안북도 도민의 날).
1981 1988. 미국에서 한글을 컴퓨터화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조국 민주화 운동을 하다.
1981. 4. 국민훈장 석류장 받음(맹인 재활 사업 공로).
1981. 4. 공 병우 사진집 발간(공병우 사진집 1호, 2호, 홍도 및 백도, 너와집, 절, 울릉도, 공병우 작품집)하다.
1982. 3벌식 한글 전동 타자기를 개발하다.
1985. 매킨토시 컴퓨터로 직결식 한글 폰트를 한국 최초로 개발하다.
1987. 1. 제1회 서재필상 받음(한글 전용, 한글 과학화 연구 및 운동 공로).
1988 1995. 한글 문화원을 개설하고, 한글 전용 운동과 한글 과학화 및 한글 문화 발전 사업에 힘쓰다.
1989. 3벌식 한글 전자 타자기를 개발하다.
1989. 공 병우 자서전《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대원사)를 펴내다.
1990. 10. 9. 은관 문화 훈장 받음.
1994. 10. 9. 세종 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다.
1994. 12. 매킨토시용 무른모 한손자판을 개발하다.
1995. 1. 《월간 중앙》1월호에 한국을 움직인 100인 중 한 명으로 뽑히다.
1995. 3. 7.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다.
1995. 3. 25. 금관 문화 훈장 받음(추서).

 

 

고 공병우 박사님 (1906-1995)